[스페인][브리우에가] 보랏빛 향기로 물든 라벤더 축제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페인][브리우에가] 보랏빛 향기로 물든 라벤더 축제

여기 가볼래?/여행지

by 꼰레체 2023. 8. 23. 01:30

본문

10년 전 즈음으로 기억된다.

 

토요일 오전 느지막이 잠에서 깬 나는

소파에 처박혀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딱히 재미난 프로그램이 없어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는데

문득 어느 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라벤더 밭 한가운데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라색 물결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장면이었다.

 

'프랑스인가...?' 싶었는데,

화면 밑 자막에 과달라하라(Guadalaja)라고

적혀 있었다.

 

과달라하라는 마드리드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한두 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과달라하라에 그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화면은 빠르게 다음 코너로 넘어가고 있었다.

 

'과달라하라인 건 알겠는데 

어딜 가면 라벤더 농장에 갈 수 있는 거지...'

미처 구체적인 지명을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 라벤더 농장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었다.

 

몇 년 뒤 나는 DSLR 카메라를 장만했고

사진을 찍으러 산으로 강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기억이 났다.

과달라하라 지역에 있던 라벤더 농장.

 

바로 구글링에 들어갔고

어렵지 않게 구체적인 지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브리우에가(Brihuega).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반 정도만 운전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

 

놀랍게도

전 세계에서 산업용 라벤더 중

10%가량이 브리우에가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길러진 라벤더는

세제, 향수 등과 같은 제품의 원료가 된다.

 

브리우에가의 라벤더 산업은

알바로 마요랄(Álvaro Mayoral)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전문 농경인이었던 그는

1963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

휴가가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보라색 물결을 마주하게 된다.

 

라벤더라는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 가치가

높은 농작물임을 알게 된 그는

해당 지역에서 원예장을 운영하던

마담 브루넬(Madame Brunnel)이라는 사람에

씨앗을 얻어 자신이 거주하던 브리우에가로

돌아오게 된다.

 

라벤더 씨앗을 심어본 결과

브리우에가에서도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해당 지역 농민들에게

쌀이나 콩 같은 기존 농작물 재배를 그만두고

라벤더를 키울 것을 권하게 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농민들도

하나둘씩 라벤더를 키우게 됐고

수십 년이 흘러 라벤더는

브리우에가를 상징하는 산업이 되었다.

 

-------------------------------------------------------------------------------

 

브리우에가에서 라벤더는 단지

산업적인 가치만 높았던 것은 아니다.

 

매년 7월이 되면 라벤더 축제가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라색 물결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은 라벤더를 보러 온다.

특히, 일몰 직전인 골든아워 시간대에 

라벤더 풍경은 환상적이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불그스름한 태양빛과

보라색 라벤더,

황갈색 토지와 푸른 나무는

절경을 만들어낸다.

 

라벤더 축제 기간 중에는 아무 시간대에나

정해진 라벤더 농장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돈을 내야 하더라도 충분히 가 볼 가치가 있는 곳인데

라벤더 문화 홍보를 위해 돈을 받지 않는

그들의 결정이 감사할 뿐이다.

 

--------------------------------------------------------------------------------

 

올해엔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어,

나름 거금을 들여 라벤더 농장 콘서트에 다녀왔다.

10년 전에 봤던 TV영상 속의 풍경을

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근무가 끝나자마자

집에 도착해서 옷만 갈아입고

여친과 여친 동생과 함께

바로 브리우에가로 출발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운전해 마을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마을은 수많은 방문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남녀노소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들뜬 얼굴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보랏빛의 향연이었다.

 

마을 안에서는 라벤더를 주제로 한

장터가 열려 있었다.

 

라벤더 꿀

라벨더 맥주

라벤더 비누

라벤더 차

 

시중에선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구매욕을 애써 참던 나는

라벤더 아이스크림에서 무너졌다.

수많은 젤라또 가게를 다녀봤지만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침 날씨도 덥겠다,

꿀을 가득 넣은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샀다.

은은한 라벤더 꽃 향이 꿀과 만나

굉장히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초콜릿 쿠키로 만든 귀여운 숟가락도

아이스크림과 제법 잘 어울렸다.

 

------------------------------------------------------------------------------

 

한동안 마을을 둘러보다 시간이 되어

콘서트가 열리는 라벤더 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가야 하는 농장은

마을에서 20분 정도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콘서트 입구로 향했다.

이곳도 역시 화이트 드레스 코드를 갖춰 입은

관객들이 콘서트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라벤더 농장.

아직 높이 떠있는 태양 때문에

보랏빛이 조금 어둡게 보였지만

은은한 꽃 향기가 코 끝을 기분 좋게 감쌌다.

 

 

 

어느덧 콘서트가 시작되었고,

Taburete라고 하는 스페인 밴드의 음악이

라벤더 농장에 울려 퍼졌다.

관객들은 라벤더 밭 사이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평온하게 음악을 감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가 언덕 너머로 넘어가며

하늘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라벤더 꽃은 부드러운 보라색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때로 흥겨운 노래로 분위기가 바뀌면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췄다.

내 바로 옆자리에 선남선녀 커플이 있었는데

서로에게 기대에 흥겹게 몸을 흔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

 

콘서트가 끝나고 어두운 밤이 되자

축제는 라벤더 농장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푸드코트로 이어졌다.

 

우리들도 여러 푸드트럭에서

피자, 햄버거, 맥주 등을 주문해

축제의 여흥을 즐겼다.

 

모든 페스티벌 음식이 그렇듯이

특별히 맛있진 않았고 가격도 비싼 편이었지만

밤이 되어 시원해진 라벤더 농장에서

흥겨운 음악과 함께

시원한 맥주와 음식을 먹는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